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(문단 편집) === 8일 새벽: 보복을 위한 비행학교 새벽 기습 === 그리고 사건은 말도 안 되게 커지기 시작했다. 공군 장교들에게 폭행당한 해병 장교들은 [[해병학교]]에 돌아가자 곧 이 사실을 동료 해병들에게 알렸다. 이번엔 해병 장교들이 분개하여,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우고 8일 새벽 당직 교육생 몇 명을 제외한 장교 129명이 각기 통근열차편으로 [[진영역]]에 집결했다. 대체 맞았던 놈들이 뭔 소리를 했길래 [[인과응보|맞을 짓 했는데]] [[적반하장|화를 낸 건지]] 상상도 안 간다. 이들은 외박 등 출타자로 위장하기 위해 복장을 [[전투복]]이 아닌 [[정모]]와 하[[근무복]]을 착용했다. 게다가 이때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'''[[무임승차]]'''를 했다. 건장한 남자, 그것도 해병대 근무복 차림의 장교 129명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힘 없는 [[역무원]]이 당장 돈부터 달라고 하기에는 힘들었고[* 그리고 이 권위주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군인이나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21세기와는 달리 단 한 명만 있어도 건드리기 까다로운 존재였다.] 결국 무임승차를 했다. 무임승차 금액은 1인당 75원으로 총 10,125원. 이 돈은 45년 뒤인 2011년 8월 해병학교 35기 동기회가 [[코레일]]에 당시 가격을 지금으로 환산하여 1백만 원으로 지불했다고 한다. [[http://m.ecolaw.co.kr/articleView.html?idxno=33966&menu=1|기사]] 그렇게 무임승차로 민간인 트럭과 버스에 나눠 타고 김해 공군비행학교 입구인 [[대저1동|평강마을]]에 도착했다. 129명의 해병 장교는 전원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논밭을 포복으로 이동하여, 마치 잠복전투훈련이라도 하듯이 비행학교 정문을 기습했다. '''보초근무를 서고 있던 헌병(현 [[군사경찰]]) 김용만 공군 [[병장]]을 납치하여 [[권총]]을 빼앗고, 조종학생 내무반으로 안내하라고 위협'''했다. 실제로 '''초병을 폭행하거나 무기를 빼앗으려고 하는 행위에 대한 대응은 즉각 발포'''로 규정되어있어서 이때 김용만 병장이 이들을 사살했다고 해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. 이 소위들도 [[베트남 전쟁|월남전]] 직전이라는 상황만 아니었더라도 곱게 넘어가긴 힘들었을 것이다. 김 병장의 안내로 새벽 5시 50분 쯤에 조종학생 [[내무반]]에 도착했고, 해병 장교 129명은 4개 내무반에 분산 침입, [[아령]] 등 운동기구와 [[돌멩이|돌]], [[주먹]] 등으로 [[새벽]]에 잠들어 있던 조종학생들을 난타했다.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잠이 깬 조종학생들이 내무반 밖으로 도망치자 돌을 던지면서 추격했다. 이같은 난투극이 한창일 때 해병대 일부 병력은 주번사령실에 침입하여, 근무사병을 추방하거나 감금한 다음 [[당직사령|주번사령]] 당직자인 공군비행학교 작전과장 최석만 [[중령]]에게 학교장과 전날 사고자를 불러 공개 사과하도록 강요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